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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퀄 - 패션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기 - 아디다스의 역사 (초창기~2차대전)

카카오빈 2021. 8. 31. 21:43

 

탑퀄 - 패션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기 - 아디다스의 역사 (초창기~2차대전)

 

이 글은 탑퀄에서 제공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아디다스의 전신은 아디다스의 창업자인 아돌프 '아디' 다슬러가 제1차 세계대전을 마치고 독일 헤르조게나우라흐(Herzogenaurach)에 있는 어머니의 다목적 화장실(또는 세탁실이라고도함)에서 운동화를 만들던 회사였다가, 1924년 7월에 자신의 형인 루돌프(Ge Brüder Dassler Schoohf)가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아디다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 Herzogenaurach지역의 전기 공급은 신뢰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 형제는 신발제작에 필요한 장비를 작동시키기 위해 때때로 정지된 자전거의 페달을 돌려 전원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Dassler는 여러 운동종목을 위한 스파이크 러닝 슈즈(스파이크) 개발에 도움을 주었다. 스파이크 운동화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그는 이전의 헤비 메탈 스파이크 모델에서 캔버스와 고무로 변신했다.

 

 

 

 

1936년, Dassler는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 손으로 만든 스파이크를 사용하도록 미국 단거리 선수 Jesse Owens를 설득했으며, 결국 이에 응한 오웬스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4개의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다슬러 신발의 이름과 명성 역시 전세계 스포츠맨들과 그들의 트레이너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업은 성공적이었고 Dassler 가족은 2차 세계대전 전에 매년 20만 켤레의 신발을 팔고 있었습니다.

 

 

 


한편, 다슬러 형제는 1933년 5월 NSDAP에 가입했고 국가사회주의 자동차 군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게다가, 아돌프는 1935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히틀러 청년 시절 스포트워트의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2차세계대전 중에는 국내에서 마지막 스포츠화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주로 독일군에게 신발을 공급했습니다. 1943년 신발 생산은 어쩔 수 없이 중단되었고 회사의 시설과 인력이 대전차 무기 제조에 사용되었으며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적어도 9명의 강제 노동자들이 이 회사의 양쪽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전차 무기 생산에 사용됐던 다슬러 공장은 1945년 미군에 의해 거의 파괴됐으나 아돌프 다슬러의 부인이 GI들에게 회사와 직원들은 스포츠화 제조에만 관심이 있다고 설득하면서 목숨을 건졌으며, 이후 미군 점령군은 다슬러 형제의 주요 신발 구매자가 되면서 다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얻게 되었습니다.

 

-> 다음 편에서 이어 진행됩니다.

 

한편, 탑퀄은 매 주 패션과 관련된 정보 및 역사에 대한 글을 기재, 배포함으로써 이전보다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할 것임을 밝혔습니다.